유대인들은 예수께 말했어요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세요” 요(6:34)
2,000년이 지난, 우리도 그들과 같은 것을 구해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굶어 죽는 일은 흔치 않아요
특별한 재난이 발생 했거나, 외부에 의한 환경이 왜곡되지
않았다면 어떤 생물체 든 굶어 죽지 않고 다 살아 갑니다.
창조 때부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당연히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먹을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지혜를 주어 그들을 
다스리는 권한까지 주셨지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욕심을 부립니다.
무엇이든지 “남 보다 더” 라는 욕심을 부립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남보다 내가 더” 라는 말이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모든 사람이 “ 남보다 내가 더” 라는 개념이 없다면,
남보다 내가 더 가져야 하고,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아예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 질까요?
욕심과 싸움이 없어지고, 갈등이 없어질 겁니다.

남보다 내가 더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은 …..
잘못도 아니고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속고 있는 것이지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 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욕심의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요?
남 보다 조금 더, 입니다.
남의 것이 많은지 내 것이 많은지는 비교할 때 알 수 
있기 때문에 만약 비교하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하지요
결국, 비교가 문제네요, 
비교하여 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아담의 아들 [가인]이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이다.”라고
우리는 말하고, 나도 동의합니다, 하지만.....0  
우리 안에 “ 남보다 더” 라는 욕심의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실행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안에 소유, 욕심, 비교, 자랑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어떤 말씀을 지키기 어려울 까요?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 남보다 더” 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역행하는 삶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하는 당신이
믿음과 삶의 괴리 때문에 번뇌하는 당신이라면 
당신 속에 “ 남보다 더” 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소박한 욕심도 그것은 태초 인간의 것이 아니고
거짓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욕심은 결국 의미 없는 허상이 아닐까요?
                ……………………..
           2021. 2. 4  /  늘감사

[문화와 일반 은총 / Richard Mouw ]

네델란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Abraham Kuyper)가
개혁교회에 선명하게 부각시킨 신학 주제 중 하나는 
[일반은총론]이었다, 첫째는 일반은총의 역사를 추적하는 
성경신학적 연구로 노아의 언약으로 부터 신약에 이르기
까지 다루었고, 둘째는 일반은총과 창조 예정, 세계역사, 
교회, 섭리, 재앙, 문화등을 논하였고, 세번째는 실제적인
문제로 정부나 교회, 그리고 국가, 가정, 사회 같은 영역에 
일반은총의 개념을 적용하여 논술하였다.

이 책의 필자인 리쳐드 마우(Richard Mouw)는 카이퍼가 
주장한 일반은총의 논지에 나타난 문화와의 이야기를 
우리 삶의 모든 형태가 문화의 일부분이라고 했을 때 
문화와 일반은총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의 주장과, 또 관련된 여러 학설을 여러 측면으로
비교하고 문화와 일반은총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주장하였다.
사실 일반은총론의 신학도 어려운데, 문화와 일반은총의
이야기 속에 수많은 신학자들의 주장과 비평,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은 이해하기 쉽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필자의
소 단락의 이야기를 퍼즐 맞추듯이 맞추어 가니 혼란했던
내용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공부하는 동안 내내 머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생각은
“신학이 신학을 낳는다? “ 당연히 신학이 필요한 학문이겠지만
어떤 신학이 정립되면 그 뒤에는 그 신학의 범주 안에서 다른
이론이 만들어 지고, 더 나아가 교회의 신앙생활의 규범이 
신학적인 논지에 맞는지가 논란이 되고, 그런 신학적인 그룹에 
예속된 조직은 그 신학적인 규범이 성경보다 우선시 되는 일이
발생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예컨대 예정론과 전택론을 주장한 칼 바르트는 역대의 신학자
임에 틀림없고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성 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경책의 몇가지
내용만으로 헤아리고 논리를 만든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배움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게으른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생각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반은총론도 카이퍼가 제시한 이래 100년이 지났지만 필자는 
세상과 교회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러나
이제 변화된 현시대에서는 문화와 일반은총이 좀더 부각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세상 문화가운데서 
일반은총을 구현해 내는 것을 역설하는 것으로 이해 되었다. 
특히 이 책의 필자인 리챠드 마우( Richard Mouw)는 칼빈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주장을 긍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소수만을
선택하신다는 지배적인 모티브 보다는 하나님의 자비가 너무도
광대하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성경의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이며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의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일반은총의
상당 부분은 마지막 때에 구원의 은혜로 드러날지 모른다 라고
말함으로, 신학적인 반론이 예상되기도 하였으나 계속해서 만일
죄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지속 된다면 일반은총 신학은 우리가 그리스도 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고 나타내도록 인도하는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기타 여러 신학의 논지들도 반대하거나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 자원임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문화와 일반은총]을 통하여 리챠드 마우는 세상 문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 신학적으로 
일반은총의 개념을 세상의 문화에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조심스러우면서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  
      ……………………..
    2021. 1. 12  /  늘감사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 핑계 이대로 좋은가?  (0) 2021.03.29
" 남보다 더 ? " 어쩌라고?  (0) 2021.02.04
믿음은 번지 점프다 !!  (0) 2020.12.08
왜 안식일에 쉬어야 되?  (0) 2020.12.04
누구를 탓하랴 !  (0) 2020.11.14

믿음을 무엇에 비유 할꼬,

[믿음],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단어이고
기독교에서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필수 요소다
아니 모든 종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설명하기 너무 쉽지만 
믿음을 증명해 보이기는 어렵다
믿음을 증명하여 내 보이기 어렵다는 말은 
내 스스로 믿음에 서 있는지 알기 어렵고
다른 사람의 믿음은, 더욱 알 수 없다.
그래서 일까 성경에 이르기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 13:5)고 말씀하신다.

나는 전에 하사관 마지막 훈련을 [고산 유격장]에서 
레펠, 외줄, 세줄, 활차하강 등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출렁다리, 짚라인 등은 눈감고도 
즐기면서 건널 수 있다,
특히 [활차 하강]은 두 손만으로 활차를 부여잡고 
호수로 하강하는 것으로 넘 두렵지만 [유격올빼미]는
능히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훈련이다.
산 정상에서 활차를 붙들고 저수지로 쏜살같이 달리는
시범을 보고, “나는 절대 못해”, 했지만 고강도 훈련은
차라리 죽더라도 활차를 거부 할 수 없게 만들고….. 
앞선 기수들의 하강을 보니, 점점 믿음이 생겨납니다.

TV에서 연예인 번지점프 도전을 보았어요
강사가 번지점프의 안전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자세와, 주의사항, 그리고 번지점프의 즐거움 스릴을
말해주니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 
“안전하다는 거 믿습니까? “
“옙, 믿습니다~~!!”
신청자 모두 믿음이 든든해 보입니다.
신청자들이 야외 번지점프 대에 오르니 모두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칩니다.


나라면 어떨까?
TV를 보면서도 가슴이 서늘하다.
설명한대로 너무 안전하고, 쉽고, 잼 있다는 그 말,
머리로는 100% 믿어요, 
하지만 몸은 거부해요, 절대 믿지 못해요~!
아무리 안전하다고 외쳐도, 두렵기는 마찬가지
떨어지면 큰일이 날 것 같아, 줄이 끊어지든지,
목이 빠지던지, 다리가 빠지던지, 기절하든지
몸이 믿지 못해요, 전신이 떨리고 혼미 해져요 
그는 연예인 스텝과 왔지만 울면서 거부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신청자가 점프 대에서 뛰어 내리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안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안전~! 믿습니다.!!” 구호까지 외쳤는데요?
그러나 현장 점프대 앞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도 같지 않을 까요? 
혹시 번지점프의 믿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유격 첫날, 훈련의 활차 하강 시범을 보고 나서
내가 하강을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4일간의 훈련과, 매일 앞선 기수들의 하강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따르르르르르~~~쾌속 질주하는 하강, 짜릿한 스릴~!
마지막에, 깃발이 보이면, 즉시 두 손을 놓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동과 스릴이 느껴집니다……

믿음은 머리로 인식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경험이 쌓이고, 훈련이 쌓이고, 다른 사람의
시범이 매일 보여야 합니다.
한번 번지점프를 한 사람은 그 뒤에 쉽게 할 수 있고
그 뒤에는 즐기면서 번지점프의 묘미를 누리겠지요
점프는 안전하고 재미있다는 것을 몸이 믿는 것이지요

주일날 교회출석 한다는 것도 10m 번지 점프입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20m 번지점프입니다.
그러나 내 삶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300M 점프보다 더 두려울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만 하면 된다고요?
번지점프는 생명의 위협 때문에 두려워 거부합니다.
하물며 내 생명을, 그분을 위해 버려야 하는데
나는 믿음으로 뛰어 내릴 수 있다고요?
내 육체가 거부 한다니까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자기를 버리면 안된다고, 절대 거부 한다니까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번지 점프대 앞에 서지 않으면 두려움도 없어요
우리 앞에 있는 번지 점프대가 무엇일까요?
내가 그 번지점프 대 앞에 서 보지도 않고서………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해도 될까요?
 ………………….. 
2020. 12. 8  /  늘감사

퍼온사진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남보다 더 ? " 어쩌라고?  (0) 2021.02.04
문화와 일반은총 /독후감  (0) 2021.01.22
왜 안식일에 쉬어야 되?  (0) 2020.12.04
누구를 탓하랴 !  (0) 2020.11.14
기독교 문화의 회복  (0) 2020.11.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