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해야 하는 진짜 이유!

 

감사!! ------

어디까지 감사해야 될까?

며칠 동안 이 감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이 자꾸만 이어서 발생하고,

어떤 생각이 자꾸만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면 일이 잘 풀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 얼굴이 밝아지고, 행복해진다

우리 다 아는 이야기지요, …

하지만 우리의 지쳐있는 삶 속에서 감사의 조건이 많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어요,

하나님~!  넘넘 감사해요.

유치원생이 하는 감사를 우린 하고 있지요.

그 정도는 믿지 않는 이웃도 하느님 감사!.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학생의 감사는 뭐냐? 하시겠지요?

범사에 감사가 정답이지만, 대학생 수준이라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전서(5:18)를 통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너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든 감사해라,

그리고 그 일로 항상 기뻐하고, 그 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무슨 심뽀로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고통의 눈물을 닦아내고

이제 울음을 멈추고, 기뻐하며 오히려 감사하란 말입니까?

 

성경에서 이렇게 명령한 것을, 우리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덕담 정도의 이야기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감사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규명해 봐야겠습니다.

나에게 어떤 사건이 터졌습니다.

è 우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두뇌는 즉시 분석합니다.

ð  내게 좋은 일인지, 혹은 나쁜 일인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판단합니다.

ð  판단 후 우리의 감정은 기쁨, 감사, 불만, 원망 등으로 표현 될 것입니다.

ð  기쁨과, 감사는 그 사건이 내게 좋은 결과를 준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ð  불평과, 원망은 그 사건이 내게 손해를 주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ð  우리는 매일 일어나는 일들로, 감사, 혹은 불평을 선택하게 됩니다.

ð  나는 하루에 얼마나 불평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불평은 내 마음에서 분석 판단하여 생겨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분석과 판단이 맞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      뭘 생각하기는…. 답이 딱 나오잖아요,

-      그 집사님 하는 거 내가 다 아는데 그러면 안되잖아요…..

-      내 사정 다 알면서 그 장로님 내게 할 말입니까?

-      나하고 아무 관계도 없지만, …그 분 하는 거 보니 영 아니데요

-      그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가 쉽게 무의식 중에 뱉는 불만의 말들이지만,

정말로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 만큼 알고 판단 합니까?

그렇게 말할 자신 있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과, 도구를 가졌다고 언젠가 한번 이야기 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가지를 생각하며 판단한다고 합니다.

할머니께 문안전화를 하는 것이 나을까, 주말에 찾아갈까?

손 씻고 밥을 먹을까, 밥 먹고 아예 양치를 할까?

식탁에서 먹을까, TV를 보면서 거실에서 먹을까?

김치를 먹을까, 아니, 된장찌개 부터 먹을까?

만약 이런 물음에 즉시 결정하지 못하면 지능이 떨어진다 할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억할 수도 없는 판단과 결정을 하루에도 수백, 수 천번을 할겁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뭐든 보는 즉시 판단하려고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판단하는 능력, 혹은 도구? 를 주셨지만 한가지를 금하셨는데,

곧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7:2) 네가 남을 판단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도 너를 심판할 것이다.(공동번역)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 원망과 불평은 어떤 사람을 판단한 결과의 표현입니다.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인데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4:12)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 잘난 머리로 우리의 이웃을 판단하여,

이러니, 저러니 불평이 튀어 나올 때

우리는 삼가 조심할 것입니다.

우리가 훈련되지 않아서 바보처럼 무의식 중에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을 마음속에 두고 오른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불평이 새어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들으시고 진노하실 것이니까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아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할 것이다.(5:9)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가데스에서 밤새도록 통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이 진노하여 40년간

훈련시킨 첫째 이유가,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었습니다.

 

나는 원래 불평이 많지만 하나님의 진노 같은 것 없었는데요?

저런~!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님께서 불평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뒤로 물러 나셨습니다.

님께서 우리형제 집사님을 불평 할 때 하나님은

100리 밖으로 물러나신 것을 왜 아무일 없다고 하십니까?

사실은 님께서 연약한 형제를 중보하고, 헌금한 일을 주께서 기뻐하심으로,

축복하고자 가까이 계셨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님께서 애를 써서 여러 번 기회를 만들지만,…

또다시 찬스를 잃고 있는데 아무일 없다니요

그처럼 점점 멀어지니 세미한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없고

그 일 때문에 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함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 이야기를 풀려다가 보니

반대되는 불평과 원망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 ……………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수많은 범사가 생겨나고 그것을 판단할 때

기쁨과, 감사 보다는 ...

불평과, 원망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너는 너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든 감사해라,

그리고 그 일로 항상 기뻐하고,

그 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나의 뜻이다.

 

불평과 원망은 너희의 것이 아니며,

너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사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그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뻐해야 할 때마다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합니까?

감사해야 할 때마다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할 때마다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합니까?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고통이라는 불편한 사건들이었군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과 고난의 사건들…..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오래 전에 여산에 있는 하사관 학교에서 공수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공수훈련은 유격과 함께, 제일 고통이 따르는 훈련과목인데

그 중에 <막타워>타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입니다.

겁이 많은 저는 그 훈련이 끝나는 순간까지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돈을 주면서까지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되는 일들도 어딘가에서는

스포츠로 즐기는 이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것이 정말 고통일까?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쉽게 설명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교통사고로 아들이 다리가 부러졌다….그 아들이 평생 불구가 된다면

그 사건은 불행한 사건일까요?

그러면, 다리 불구인 사람은 누구든지 다리가 정상인 우리보다

항상 모두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걸까요?

그러면 양쪽 다리가 없는 사람은 어찌되는 겁니까?

, 듣지도, 보지도, 말도 할 수 없었던 헬런켈러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까?

우리가 고통, 불행, 고난이라 부르는 것도

우리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나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고통이라고 여기는 것도 우리가 마음먹기 따라서는

취미생활이나 스포츠 같이 우리의 집념을 요하는,

혹은 강한 의지력과 극기를 테스트하는 과정은 아닐까요?

 

고통이 결국에 고통으로 끝나고, 고난이 고난으로 끝난다면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셉과, 다윗을 보여주시면서 설명합니다.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할 것이다

 

우리가 끝을 예측할 수 없고 현재의 고통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두렵고, 고통스러운 좌절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겪는 어떤 사건 이든지

반드시 끝이 아름답고, 귀하게 될 것 이라는 보장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보증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다면 우리는 인생을 두려워 할 것 없이 즐기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은 단지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눈앞에 보이는 절벽과, 험산준령?

  그러나….이 또한 지나갈 것이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나라 4천만 국민이 똑같이 아름다운 집에,

똑같이 이쁜 딸을 낳고, 똑같이 멋진 아들을 낳아서

똑같이 서울대학교에 보내고, 똑같이 훌륭한 저택에서,

똑같이 멧돼지 바비큐를 즐기고, 똑 같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똑 같은 침대에, 똑같이 잠든다…..

 

만약 똑같지 않, 서로 다르면 남의 밥의 콩이 크게 보이므로

상대적으로 불평이 나오게 되어있습니. 아무리 잘해줘도…..ㅎㅎ

이게 세상이라면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모험과 스릴을 좋아하고, 프로축구 경기를 좋아하고,

고스톱에서 피박을 씌우고, 시원한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는

우리 인간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따분한 일일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마다 독특하게,

다양하게, 기발하게, 이 세상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안에 수없이 많은 다양한 일들이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양한 일들을 사람들은

입에 달면 좋은 것, 입에 쓰면 나쁜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냥 감사함으로 즐기면 되는 거란다.

어떤 것은, 번지점프처럼,

크로스컨트리 경주처럼, 두렵고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일의 결국이 내 손안에 있고,

너희 인생의 주관자는 너희가 주님이라 부르는 내가 아니냐?

세상의 수많은 일이 얽혀 있어도

그것을 이끌고 섭리(攝理)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감사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 가며

너희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지니

 

수년 전에 ,

교회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서울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유적지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와서 순교한 선교사들의 묘역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양화진 홀" 기념관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선교한

여러 선교사의 삶과 그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이 있었습니다.

한글성경을 출판을 기념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헌사(獻辭)를 남겼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비방(誹謗)이 극에 이르고

정의가 차츰 사라지는 이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폐하께,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  대한광무(光武)10년 병오 ***

 

대한광무 10년은

1906년으로, 1910년에 한일합병이라는 강점기를 4년 앞둔

조선이 망국으로 치닫는 풍전등화 같은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한글성경 출판을 기념한 헌사를 일필휘지한  그 분은

한민족이 잠에서 반드시 깨어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고 ….

세상에…………………………………………..,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헌사에서 말했듯이 비방이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는

조선 내부의 정치와, 세계열강 속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던 암울한 그 시대에

그분은 어떻게 ....

2000년의 한국을 미리 보았을까요?

그것이 우리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그 단어 외에 어떤 더 적절한 표현이 있겠습니까?.

그 기념관 마지막 출구에 서있는 대형 병풍에는

 섭리”(攝理) 라고 딱 두 글자가 쓰여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의 역사를 알고,

우리 선조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죽음을 알고,

현재 우리를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섭리라는 글자 앞에서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와, 기쁨, 기도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은 끝이 아니며 곧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끝에는 두 팔 벌리고 우리를 맞으시는 주님이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 2013.  7.  2 / 늘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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