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설교]의 저자, 토마스G.롱

 (Thomas G. Long / Theology Emory University)

교수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 신대 설교학 교수로

1989년 경에 초판을 집필한 것으로 “기존의 방식”

이란 설교를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개론서 이자

현직 설교자들을 위한 재충전 자료로서, 필자는

본문 해석과, 구두 설교와, 모든 설교 구성에서

[복음에 대한 증언] 이라는 신학적 이미지를

적용하고 체계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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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통하여 지금까지 수십년을 들어온

설교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 중요한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설교자는 회중으로부터 나와 강단에 서는

것이라는 근본 원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선포하는

대언자로 여겼기 때문에 회중과는 다른 위치에서

살고 그에 따른 권위를 그 분의 품성과는 관계없이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갖는 직무가 부목사, 교육목사,

담임목사, 전도사 등, 서로 다른 업무를 수행하고

그 권위도 다르다 생각은 하지만, 근본적이거나

암묵적으로, 평신도는 그 직무를 대신 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사도로 부터 설교가 시작 되었고,

구약시대의 회중을 위한 제사장은, 신약에 와서

주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의 직무와 성스러운

제물이 되셨으니 목사가 제사장이 될 수 없고,

우리를 위해 대신 중보 하는, 직무가 아님은

대부분의 성도는 알지만, 정작 목사는 모르는

것처럼 그 권위를 내려 놓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목사는 왜 그 권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일까? 짧은 소견으로는 교회조직의

유지 때문에, 큰 권위를 세워주고, 그 밑에서 좀

작은 권위를 갖고 싶은 조직 때문이 아닐까?

결국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고 더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현 상태가 유리한 구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에 나온 설교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대사]의 이미지로서의 설교자는 초대교회에서

사도의 설교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서,

모든 설교자가 성령에 붙들려 말한다면, 이

[대사]이미지의 설교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붙들린 설교자는 예쁜

수사학적인 어휘로 회중, 각인의 괴로운 마음을

쓰다듬기 위한 언어와, 형편에 맞는 이야기를

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설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주님께로 나가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에 붙들린 설교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일

것이기 때문이고 그 성령의 임재는 스스로

아버지께서 오게 하는 그들을 부르기 위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이 지금도 똑

같이 오시는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겪었던 많은

설교자에게서 그러한 역사를 적시에 자주 기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특별한 설교자가 많지 않을까?

 

다시 오늘 주제로 가서 20세기 중엽 이후

[대사]이미지의 설교가 힘을 잃었다면 그것은

[대사]의 품격과 영성이 없으면서(성령의 임재가

없는) [대사]의 이름과 형식만을 유지 하였다면

칼을 칼집에 넣은 채로 칼을 휘두른 용병이

질 수 밖에 없는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설교자가 성령의 검을 뽑을 능력이 없다면

(성령의 검은 아무나 뽑을 수 있는 칼이

아니어서 /전설 속의 엑스칼리버의 검처럼)

다른 방법으로, 즉 설교 듣는 사람을 어떻게든

감동 시켜서, 그 사람이 스스로 성령의 검에

뛰어 들게 하는 방법이 더 쉬워 보였을 겁니다.

결국 단칼에 찔러 쪼개 버릴 것을

엄청난 노력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회중으로

하여금 두렵고 보이지 않는 성령의 불에

뛰어 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온갖 더럽고 악한 영들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텐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전체 중에 다수의

설교자가 엑스칼리버의 칼을 뽑기 포기하고,

좀 쉬워 보이는 방법으로 [목회자의] 이미지의

설교가 개발 되고, [이야기꾼/시인의] 이미지가

개발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이미지 설교]를 체득한

설교자가 모두 성령에 붙들린 설교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모든 이미지의 설교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령에 붙들린 설교자가

이러한 좋은 [이미지의 설교]의 장점들을

체득 하였다면 더 잘 사용 되겠지요.

 

[증언하는 설교]의 내용도 획기적이어서

“다시 하나님께로” 라는 구호처럼 신선한 충격을

주는 토마스G.롱의 역작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방법을 실행 하는가? 입니다.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설교자가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가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생각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상태이다” 라고

할 때 이 [증언 이미지]의 설교는 단연 우선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설교지침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

2020. 6. 17 / 늘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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